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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학 정신의 교육 목표

건학 정신의 교육 목표에의 구현

<머리말>

과거란 지난 날에 있었던 것이 이제는 망각의 세계로 사라져 버린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이미 지나 버린 것으로서 단절되어 현재와는 무관한 느낌에서 온 결과다. 허나, 현재까지 끊임없이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작용이 효력과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면 별 뜻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나 버린 사실들이 우리들의 의식과 기억 속에 살아서 우리들의 일을 제약하고 있음직도한 것이다. 남주선생이 지난 날에 이 지역사회에 미친 불멸의 공헌은 '지난 일'이지만 오늘까지 영향을 주면서 우리의 현실을 필연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 아닐까.

여기에 작용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자유롭게 규정한 것이요, 우리들의 힘에 의해서 있게된 것이라면 그 작용의 효과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 곧 장래에 있음만한 것을 현재의 입장에서 규정하는 셈도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는 미래에 의해서 바람직하겠금 규정돼 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가 현재없이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현재도 미래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남주 선생의 건학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주선생의 인간상

가. 열화같은 진리탐구

바로 1세기전 1892년은 남주선생이 태어난 해로 기억한다. 수려한 한라산 풍광을 배경삼기에는 아직은 한촌(寒村) 범주를 떠날 수 없었던 법환망르이 선생의 정든 고향이다. 당시 대외적으로는 열강의 이권의 침탈로 민족의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조국의 자주독립, 민권사상, 그리고 자강혁신 운동을 목표로 구국운동이 일어난 때였다. 이러한 분위속에 우리나라를 병탐한 일본이 대일항쟁을 탄압하고 드디어 한일합병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 들게됐다. 게다가 당ㅅ 우리 고장의 교육상황을 보면 한문을 배워보겠다는 젊음이가 있는 마을에서는 쌀 75말, 말 3-4필을 주어 향교에 보냈던 때다. 그러나 한문서당의 문지팡도 찾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것이 남주선생의 젊었을 때의 처지였다.

내가 만난 모인사의 말에 따르면 남주선생은 이런 처지를 극복하고져 16살 되던 어는날 고향을 등지고 서귀포에 있던 일본인이 경영하고 있던 통조림공장 일용직으로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이 무렵서부터 낮에는 땀 흘리며 일에 종사하고 밤에는 눈물어린 고학의 길을 열고져 인생의 피나는 결전을 벌이게 된다. 그것도 그럴 것이 개항이후 안으로는 개토(開土)와 척사(斥邪)의 갈등이 채 아물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 외세의 침투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정국이 혼미가 가중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계몽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문명개화와 자가부강의 바탕이 교육에 있다는 공통된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남주선생도 그 영향을 받게 됐으리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선생에게 가르쳐줄 훈장도 없었고, 참고자는 물론, 교과서마저 없는 터에, 어떻게 독학으로 문맹의 경지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저으기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구한말에 발간된 민족진영을 오대신문이 민족의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하여 필봉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젊은 남주선생이 무슨 수단으로라도 언문을 배웠고 국한혼용으로 발행된 신문을 첫줄서부터 마지막 줄까지 한줄 빼놓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글귀중에 만약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일일이 옥편을 찾아 익혀다고 한다.

군수와 도지사로 일할 때는 이미 유식한 경지에 있었다고 하니 그의 피눈물나튼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랴. 더욱이 신문에 의한 독학은 신문내용에 영향을 받아 남주선생늬 민권사상을 굳혀나가는데 큰 몫을 했다고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열화와 같은 향학심과 진리탐구의 남주선생의 인간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 주체성 뚜렷한 의지

남주선생의 이야기가 나오면 으례히 이구동성으로 주체성이 뚜렷한 분이었다는 것이 정평이다. '나'는 다른 그 구구도 아닌 '나'로서 여기에 있다는 주체의식의 입장이었다. 남주선생이 남제주군수로 있을 때 일화 하나가 있다. 남제주군 청사의 낙성식이 있었다. 때마침 길성군지사가 식전에 임석하게 되었다. 그는 원고없이 약 40분 동안 당당한 목소리로 고사(告辭)를 해 내려갔다. 그는 명색이 일본대학 철학과 출신으로 빈손으로 연설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이 났었다. 곧이어 강군수가 담담한 각오로 단상에 오르게 됐다. 내무과장이 미리 준비해온 식사원고를 탁상위에 내놨다. 그러나, 강군수는 탁상의 원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길지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빈손에 즉흥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연설시간도 길지사보다 10분이 더많은 50분 동안을 해서 참석자를 놀라게 했다. 그의 뚜렷한 주체적 결단성이 있었기에 민선지사의 선거에서 승리를 가져왔고, 과감한 개발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고, 나아가 남주고교의 산자(産者)의 주역으로 그 저력을 과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결코 남에게 질려고 하지 않는 자아개념이 뚜렷해떤 모습을 재확인하게 해준다.

다. 청렴결백한 전형

무심코 강물의 흐름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안정된 인감미같은 것이 우리 마음의 문을 노트할 적이 있다. 남주선생이 민선도백으로 소임을 다할 때 일이다. 급작히 선출하게 되어 돈 100원이 필요하게 되어서 모국장을 부르게 됐다. '국장, 미안하지만 돈있거든 100원만 꾸워 주시게' 그서가 돈을 꾸어 갔는데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국장을 불러 '자, 이거 어저께 꾼 돈일세'하며 어김없이 돌리는 것이었다.

또 한번은 초도순시차 북제주군 구좌면사무소에 가게 됐다. 출장가게 되는 직원을 불러서 '내일 출장가게 되는데 꼭 점심을 싸서들 오시게' 그런데 당일 출장을 와서 보니, 면장이 많은 점심을 사전에 준비해 놓았다. 이를 본 강지사는 '오늘 점심을 빵으로 가져 왔으니 내 몫으로 준비한 것이랑 내 버려 두게. 내버려두면 가 먹게 될터이니까. 날랑 옆차난 한 잔 주면 좋겠네'하며 구치 차려놓은 점심을 사양하더라는 일화다. 매우 평범한 일인 것 같으면서도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닫는게 있다.

당시 측근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최승만지사와 강지사는 남에게 신세를 질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폐란 말을 부칠려고 해도 부칠 곳이 없는 분들이었다는 회고이다. 이면과 표면을 적나라하게 보이면서 떨어지는 단풍과 같은 소박하고 청렴한 남주선생의 성품을 측량해 보는 좋은 예다.

그의 청렴한 품성은 어쩌면 정서적으로 건강한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라. 공동체개발에의 선구력

가령 우리가 자연을 안다고 할 때 이미 되어진 자연을 변하게 하여 알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연에 대해서 인간의 조작이 없이는 이를 드러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객관이라고 본다면 인간의 조작은 주관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객관에 대한 주관의 작용이 있음으로서 역사적 현실이 전개된다하겠다. 남주선생은 불변의 객관에 도전했을 뿐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 속에 유연하게 대응하여 도전의 발상을 가능케한 분이었다고 본다.

대개의 경우 도백의 취임 제1성을 보면 관기확립이라는게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강지사의 도정지표는 통례적인 요식에서 벗어나 대제주건설이라는 전제하에 시정방침을 국토개발, 관광개발, 그리고 농수산 진흥 등도 되있었다. 이러한 구상은 객관에 대한 남주선생의 의지의 작용으로 본다. 하기야 국토개발이라고 했으니 국가시정 방침도 아닌에 무슨 국토냐 하는 반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줌의 땅도 국토임에 틀림없다는 논조이고 보면 대승적 견지에 서 있었다. 그로고 종업에는 제주개발의 핵심이어야 했던 관광이 묵살돼 왔다.

농수산업의진흥만 해도 한편으로는 자고로 천연적인 축산적지인 점을 심안한데서온 구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수산가공업의 실험적 경영을 통해 남지나해개척에 이바지해온 강지사였기에 자연에의 도전이 우리의 활로인 수산업의 진흥으로 연결한 것은 당연스런 조주였다고 본다. 남주선생이 다가오는 변화를 속수방관하지 않고 변화하는 상황을 선수필승의 손을 쓸 수 있는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애향심의 화신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누구 못지 않게 지니고 있던 민선지사로서의 협화(協和)의 인간상을 이런 측면에서 보게 된다.

마. 사회환원을 위한 검약

옛날에는 돈이 있는 사람은 구두쇠라는 말을 듣기 마련이었다. 남주선생 경우에도 인색한 사람이란 말을 듣는데는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손끝이 부르터질 정도로 일하여 허리끈을 졸라매고 돈을 모으노라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도 잊어 버리고 검약생활을 일상화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소신있는 군, 도정을 펼 수 있었던 것도 청렴결백한 토대가 된 것도 근검이었다. 중요한 것은 10년, 3년, 1년, 1개월, 1주일, 하루의 단계로 생활설계를 세워 조금씩 목표를 지향했다. 그래서 남주선생은 구두쇠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싶어서 각고 무릅쓰고 거금을 모았다. 그러나 선생이 어려서 남과 같이 공부를 못한 한의 회복과 기업의 성공적 원인을 지역사회에 있음을 달관했다. 이래서 지역사회의 대환원 작업의 동기를 유발했으니 이것이 남주학원의 산파적 역할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유일성을 인식한 남주선생의 부차적인 향토애로 승화시킨 인간승리의 종장(終章)을 큰 눈으로 우러러 보게 된다.

<건학정신의 참뜻>

"두 주먹을 불끈 쥐라. 그래서 앞을 똑바로 보라."

이것은 남주선생이 생존시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힘주어 하신 이야기로 지금도 지도받아온 졸업생들의 입에 여전히 오르내리고 있다.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의지와 큰눈으로 똑바로 앞을 내다 보는 원대한 희구(希求)의 상징에서, "참되게 살자"는 오늘의 남주선생상의 원류를 찾게한다.

나는 교훈에서 全心으로 진지(眞知)를 사랑해 마지 않는 성실한 태도가 요구되고 있다고 본다. 참(誠)이 결여될 경우 모든 지식과 기술도 참(眞)을 왜곡하는 수단으로 바뀌고 말 염려가 드는 것이다. 무릇 진리가 밝(明)고 어둠(昏)이 아닐진데는 우리가 가장 양심적인 경우에 비로서 사물은 우리에 대해서 그 진리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참(眞)과 참(誠)이 미래 무관한 것이 아니고 긍국에 가서는 하나가 안될 수 없는데서 남주교훈의 진가를 다시금 자각케 해준다.

이제까지 남주선생의 생존시에 사회에 기여한 편구상(片久想)을 소개해 왔다. 아무튼 남주선생의 특성은 항상 집단을 대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준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린 시절부터 가진 역경을 딛고 독학으로 이룩한 높은 지력, 하는 사업에 관심의 폭이 넓은 활동적 성향과 강한 신념, 남달른 선구력과 결과에 대한 정확한 예측력, 그리고 인화(人和)중심의 희생이 없는 과업수행 등은 그의 특성의 속성으로 종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속성의 종합이 남주선생의 총체적 인간상이라고 본다. 이 총제적 인간상은 다양한 성품을 갖춘 인간들이 서로 협동할 수 있는 소지를 갖춘, 이른 바 전인적 인간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겠다. 따라서 이러한 전인적 인간상의 속성을 교육목표에 반영하는 것은 남주선생의 건학정신을 구현하는 기저로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 것이다.

<맺는말>

남주선생은 한촌빈가에 태어나 독학으로 천신만고의 역경을 딛고 실업계, 행정계, 정치계 그리고 교육계 등 가장 넓은 영역에 걸쳐서 활동하고 많은 빛나는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다. 고난의 생활이 아니였던들, 영광의 빛은 덜 했을 것이고 불멸의 업적이 이니었던들, 추모의 정이 컷을 것이다. 고뇌와 환희가 정비례한 것임을 암시해 준 좋은 예라 하겠다.

땀과 눈물로 얻은 남주선생의 소산이었기에 그의 여생의 안락에 구했을 만도 했다. 그러나 사심없는 공동체의 일원을 달관(達觀)하고 남주학원 건립기금에 쾌적(快適)했다. 이 사회환원의 정신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애향, 애족의 인물로 우러러 보게 한다.

남주선생은 이제 구천에서 영겁을 헤아리고 있을 지라도 유훈은 우리 모두에게 천금이상의 보람을 안겨주고 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어라 하신데서 의지와 신념과 결의를 남주가족들에게 주었고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내다보라 하신데서 대망과 비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참다움 의미에서 의지와 신념과 결의도 성실(참)한 마음의 바탕이 없으면, 성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진리(참)를 탐구함이 없는 대망과 비젼을 자칫하면 허망스런 환상의 꿈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나 아닐까.

변화무쌍한 역사적 현실은 새로운 면모속에 또다시 우리의 협화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단절위에 선 현실을 미래에 우리 행동의 방향이 어떤 구상이어야 하는 것은 제약하고 규정하려 들고 있다. 아무쪼록 이 행위의 제약이 나태 대신에 노력, 좌절 대신에 출발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대 본다. 허나 이 기대도 우리 현실에서 바람직한 학교를 건설하는데 상호협조가 전제가 된다는 것을 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남주고교의 교원들이 인사(仁師)로서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일뿐더러 경사(經師)로서 인격으로 학생과는 신뢰동행의 바탕에 학부모와는 협동의 토대위에 귀하게 세운 학교문화를 빛내고져 혼신을 다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10대 교장 현승우 선생님의 회고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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